아사카와 노리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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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사카와 노리타카는 일본의 도자 연구가로, 일제강점기 조선의 도자기를 연구하고 그 가치를 알리는 데 기여했다. 그는 1913년 조선으로 건너가 백자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으며, 야나기 무네요시에게 이를 소개하여 조선 백자가 일본에서 주목받는 계기를 만들었다. 1924년에는 경복궁 안에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하여 한국 문화유산 보존에 힘썼으며, 조선 도자 연구를 위해 700여 곳의 가마터를 조사하고 500년에 걸친 조선 도자 역사를 정리했다. 그는 3.1 운동 이후 조각가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일본으로 귀국 후에는 연구와 저술 활동을 이어갔다.
야마나시현 기타고마 군(현 호쿠토시) 출신이다. 1906년 야마나시현 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고후 기독교회에서 고미야마 세이조와의 만남을 통해 조선의 미술에 동경을 품어, 1913년 (다이쇼 2년), 한국 병합 3년째인 한반도로 건너갔다. 처음에는 조선 도자기의 "청자"에 매료되었지만, 우연히 본 일상적인 그릇 "백자"에 매료되어, 야나기 무네요시 (사상가, 민예 운동 창시자)에게 소개했다. 이것이 조선 왕조 시대의 백자가 일본에서 주목받는 계기가 되었다.
2. 생애
1924년 (다이쇼 13년), 일본 통치하의 경성 (현 서울)에 야나기 무네요시와 동생 아사카와 다쿠미와 함께, 문화 옹호와 계승을 위해 "조선민족미술관"을 경복궁 안에 설립했다. 소장품은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계승되었다. 또한, 조선 도자 연구를 위해 한반도 700여 곳의 가마터와 일본의 요업을 조사하고, 500년에 걸친 조선 도자의 역사를 정리했다. 그 방법은 "도편을 읽는다"라는 하쿠교 독자적인 수법이었다. 도자기에 대한 혜안으로 "조선 고도자기의 신"이라고 불렸다. 조사·연구에 대한 자세는 현장 연구를 중시하는 꾸준한 노력의 축적에 의한 것이다.
62세에 일본으로 귀국한 후, 도베(에히메현)에서의 지도·작도, 집필·강연, 야마나시현 예술제 심사원 등 연구자로서의 일생을 관철했다. 1964년 (쇼와 39년), 거주하던 지바시에서 사망했다. 사후 저서 『부산 가마와 대마 가마』, 『이조의 도자기』, 『아사카와 하쿠쿄 조선 고도자 논집』 1-2권[1][2] 등이 정리되었다.
3·1 독립 운동 (1919년)이 시작된 다음 달, 신카이 다케타로에게 조각을 배우고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교직을 그만두고 단신으로 도쿄로 나가 신카이의 제자가 되었다. (1922년 4월에 조선으로 돌아와 도자 연구에 들어감). 그리고 10월, 제2회 제국미술원 전람회에서, 조선인 남성상 조각≪나막신을 신은 사람≫이 입선했다. 신문의 입선 인터뷰에 응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2. 1. 유년기와 교육
아사카와 노리타카는 1884년 일본 야마나시현 기타고마 군(현 호쿠토시)에서 태어났다. 1906년 야마나시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현내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고후 기독교회에서 고미야마 세이조를 만나 조선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2. 2. 조선으로 건너가다
아사카와 노리타카는 1913년 미에다 다카요와 결혼 후, 한국 병합 3년째인 한반도로 건너갔다. 처음에는 조선 청자에 매료되었으나, 이후 일상적인 그릇인 백자의 아름다움에 빠져 야나기 무네요시에게 소개했다. 1919년 한반도에서 3.1 운동이 일어나 교직을 사임하고 단신으로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1922년 다시 한반도로 돌아갔다. 1924년 경복궁 안에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하였고, 소장품은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계승되었다. 1930년에는 조선 도자기를 조사하여 "부산 가마와 대주 가마"로 정리하여 발표했다. 1946년 자신이 수집한 조선 고도 30상자, 공예품 3000여 점, 조선민족미술관 수집 자료를 정리하여 한반도 관련 기관에 수납을 신청하여 납부하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2. 3. 조선 도자 연구와 조선민족미술관 설립
1913년 (다이쇼 2년), 한국 병합 3년째인 한반도로 건너가 조선 도자기 "청자"에 매료되었으나, 이후 일상적인 그릇 "백자"에 매료되어 야나기 무네요시에게 소개했다.[1][2] 이는 조선 왕조 시대의 백자가 일본에서 주목받는 계기가 되었다.
1924년 (다이쇼 13년), 야나기 무네요시와 동생 아사카와 다쿠미와 함께 경성 (현 서울) 경복궁 안에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했다.[1][2] 조선 도자 연구를 위해 한반도 700여 곳의 가마터와 일본의 요업을 조사하고, 500년에 걸친 조선 도자의 역사를 정리했다.[1][2]
3·1 독립 운동 (1919년)이 시작된 다음 달, 신카이 다케타로에게 조각을 배우고 있었기 때문에 교직을 그만두고 도쿄로 나가 신카이의 제자가 되었다.[1][2] 제국미술원 전람회에서 조선인 남성상 조각≪나막신을 신은 사람≫이 입선했다.[1][2]
2. 4. 조각가로서의 활동
2. 5. 일본 귀국 후 활동
1946년 자신이 수집한 조선 고도 30상자, 공예품 3000여 점, 조선민족미술관 수집 자료를 한반도 관련 기관에 기증하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도베 (에히메현)에서 지도 및 작품 활동, 집필, 강연, 야마나시현 예술제 심사원 등 연구 활동을 계속했다. 1956년에는 『이조의 도자기』를 저술했고, 1960년에는 『도기 전집 제17권 이조 염부・철사・백자』를 편저했다. 1964년 지바시에서 사망했다.
3. 주요 저서 및 작품
3. 1. 저서
3. 2. 조각 작품
4. 관련 시설
국립중앙박물관은 아사카와 노리타카가 경복궁 안에 설립했던 조선민족미술관 소장품 일부를 계승하여 소장하고 있다.[3] 아사카와 노리타카·다쿠미 형제 자료관은 아사카와 형제의 일기, 유품, 도자기 조각 등을 소장하고 있으며, 고향인 호쿠토시 다카네 정 무라야마키타와리의 "다카네 평생 학습 센터" 내에 있다.[3]
5. 평가
아사카와 노리타카는 일제강점기 조선의 도자기를 연구하고 그 가치를 널리 알린 선구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연구는 조선 도자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특히 "도편을 읽는다"라는 독창적인 연구 방법은 후대 연구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24년 경복궁 안에 조선민족미술관 설립을 통해 한국 문화유산 보존에 힘썼다. 그의 소장품은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계승되었다.
6. 참고 문헌
- 다카사키 소지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의 생애』 소풍관, 1987년(증보 3판 2002년)
- 『회상의 아사카와 형제』 다카사키 소지・후카자와 미에코・이상진 편, 소풍관, 2005년
- 이상진 『아사카와 노리타카・다쿠미 형제의 조선 이해에 관한 연구』 (논문) 오차노미즈 여자대학교, 2007년
- 『아사카와 노리타카의 눈 + 아사카와 다쿠미의 마음』 이토 이쿠타로 감수, 사토분 출판, 2011년
- 『예술신조 특집 이조의 미를 가르친 형제』 1997년 5월호, 신초샤
- 『아사카와 노리타카 자료전: 야마나시가 낳은 이조 도자 연구의 선구자』 야마나시현립미술관, 1988년
- 미즈오 히로시 『평전 야나기 무네요시』 지쿠마 서방, 1992년 / 지쿠마 학예 문고, 2004년
- 『평전 '''아사카와 노리타카'''와 다쿠미~14권의 일기장』 사와야 시게코 작 아스카알토 화, 2021년
참조
[1]
블로그
新刊『浅川伯教 朝鮮古陶磁論集』
https://asakawabroth[...]
2018-04-30
[2]
뉴스
沢谷滋子「白磁の美 伝えた兄弟追う◇朝鮮総督府時代 優れた鑑賞眼で古陶磁愛した日本人◇」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8-02-07
[3]
블로그
アクセス・利用案内
https://asakawabroth[...]
2018-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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